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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http://i105.photobucket.com/albums/m236/eringray00/barack-obama-bw.jpg>

 

<오바마 미 대선 후보 수락 연설 전문(Click)>


42분이 넘는 시간을 앉아서 다 보게 한 연설이었다. 마치 미국 드라마 한 편 본 기분.
미국인들은 저 정도의 경과 시간을 좋아하는 듯 하다-_-;

사실 미 대선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저 사람이 원하는 자리에 오르면
'우리가 사는 이 곳' 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의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근데 이건 까봐야 알 것 같다. 암튼 오바마 후보는 지금까지 그래도 비교적 나은 편이었던
클린턴 전 대통령의 느낌을 주고 있다. (중간에 흠칫할 발언도 있었으니 역시 까봐야 안다)

현재 저 연설문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에 비견되고 있다. 나도 주욱 참고 본 결과

"정말 듣고 싶은 말을 간결하고 적절하게 해주고 있었다."

내가 미국인이었다면 진짜 왠지 모를 감정에 울컥했겠다. 다만 난 누가 되든
"일단 우리나라에의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런 것은 있다. 말쟁이들의 문제는 행동이다. 행동은 변화를 향해 움직이는 것...

내가 본 저 준수하게 생긴 '일단 높은 자리에 오를 준비가 된 무언가 있어보이는 미국 국적의
말쟁이님' 은 "Change" 를 내세우고 있다. (행동하겠다는 의지 -  근데 이 것은 선거의
저 단계에서 다 하는 것-_-; - 를 선언하는 것이다)

난...일단 말을 무척 잘 하고 저 정도 수준의 Script를 본인이 작성했다는 것...그리고 저 정도로
유려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매우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울렸다잖냐?

아닌게 아니라 미국의 현재 답답한 부분만 잘 추려내서 그 것에 대한 Vision을 제시하고
파편화된 유대감을 고양시키는 진행을 매우 훌륭하게 해냈다. 저 정도 규모의 "큰 일(미 대선)"
에는 내가 "이런 큰 장소, 중요한 시간" 에 속해있다니! 그리고 뭔가 뜨거워지는 가슴을 
안고 있다니! 를 전달해야 양심이 있는 장사인 것이다.

암튼 잘 즐기고 있는 미국 국민들 부럽다. 잘 뽑아보길.
(선거도 어찌 보면 민주주의를 끼고 있는 나라에서는 축제이다. 말 그대로
선거날 '그 날 쉬는 목적' 은 제끼고 '자기만의 축제' 를 즐기시는 분들도 많고-_-;)  
오바마 후보도 잘 뽑혀서 말한 대로만 지켜주길 기원한다. 이왕이면 이 쪽 사정도
좀 세심하게 다뤄주길.

정치 얘기하니까 내 성향이 궁금한 사람도 있겠다. 전에 한 번 성향에 대한
설문을 작성하는 사이트가 있었는데 결과가 적당히 중간이더라-_-;
그런 것 같다. 난 "생각 깊고 행동 잘 하는 사람" 편이다. 나의 지지가 필요할 수도
무시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소신껏 잘 해보길...당신들 자식이 욕을 먹는 것도 고려한다면 잘 할 수 있지 않겠나?

음...정치공학에 대해서 더 공부하기 전에는 이렇게 연설 잘 하나 행동 잘 하나만
가지고 말할 것 같으니 무언가를 기대한 분이 계시다면 죄송.

음...매케인 쪽도 들었어야 하나...지금 쫌 지쳤다. 나중에...것보다 다 끝나고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 오나까지 오면 더 관심이 생길 수도...뭐 어쩄든 다이다이는
재미있으니 중간에 글은 안 써도 관전은 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람들은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의 나라를 이끄는 인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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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r.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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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theseattletraveler.com/wp-content/uploads/2007/07/william-shakespere-thumb.jpg



 

[Shakespeare' s Four Major Tragedies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Black Scholar/Mr. TExt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게으른 방법이기는 했지만, 대학에서의 수업 시간표에 “셰익스피어” 라는 이름의 수업을 넣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어릴 적 램 남매의
<셰익스피어 이야기 Tales from Shakespeare>를 통해 그의 비극을 접한 후, 대학에서의 수업은 너무도 꽉 차고 유익하여서 유년의 기억이라는 ‘크리스마스 트리’ 에 ‘별 모양의 장식’ 을 올림으로써 ‘셰익스피어와 나의 소중한 만남’ 이라는 화려한 성탄절과 같은 잔치를 벌이게 해주었다. 그 수업에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극인 “Macbeth” 와 두 번째로 좋아하는 희극인 “A Midsummer Night's Dream" 을 텍스트로 썼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난 소중한 분들과의 소중한 인연으로 ”월요문학“ 이라는 가슴 벅찬 이름과 함께 ”Shakespeare's Four Major Tragedies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을 제대로 독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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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svebor-secak.iz.hr/ghostogvanja/upload/hamlet800011.JPG>


1. Hamlet


  사실 처음 발제를 준비하면서 Hamlet에 대한 고정관념은 특정한 방향으로 이 작품에 대한 인상을 이끄는 면이 있었다. 주인공의 깊은 고뇌함, 특히나 우유부단한 인간형의 정형성 - 우유부단은 내가 제일 경계하는 것이기에, 지금은 좋은 분들과의 만남에서 많이 배우면서 고쳐지지 않았나한다 - 이라는 고정관념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깨지기 시작했다. 덴마크의 왕위 계승권자로 예정된 Hamlet은 다만 자신과의 내적인 대화가 많았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의심하거나 반추하며 복수의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저 ‘순수했을’ 오필리어는 자신의 과오를 우아하게 포장하고 욕망을 향해 끝없이 움직이는 추악한 인간 군상의 모순 그리고 운명의 변덕스러움의 희생양이 된다.

  이러한 점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공통적인 특성으로 추출될 수 있으리라 사려 된다. 비슷한 성격의 인물이 그의 작품에 연이어 등장한다. 셰익스피어는 악의가 없는 인물이 운명의 잔인한 변덕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에 원초적인 비극성이 있음을 깨닫고 있었던 듯 싶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클로디어스나 폴로니어스가 젊은이를 획책하거나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아첨을 할 때 언급하는 내용들이었다. 거기에는 인생의 연륜과 적절한 지혜가 있었다. 역시 Shakespeare는 ‘말쟁이’ 였다. 그의 인물 하나하나 불필요한 말을 뱉지 않으면서 풍부한 언어가 특정 작품 속에서 황홀한 춤을 추고 있다.

  Hamlet은 광인인 듯 연기를 하며 오히려 격식을 차릴 때는 내놓을 수 없는 진실을 계속 던진다. 이것은 오필리어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재미있는 이야기, 튼튼한 서사 구조라는 피상적 인상에 의한 감상일 수 밖에 없었던 유년의 Shakespeare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대학을 졸업 후에 미약하게나마 견지하게 된
분석적 시각을 활용해 다시 읽는 Hamlet은 그 맛이 또 달랐다. 발제를 준비하고 공부를 하면서 더욱 재미있었던 점은 괴테의 “파우스트” 같이 이 작품도 “원형 햄릿” 이라는 원전이 존재했고, 이러한 각색의 탁월함이 셰익스피어에게 ‘그의 대표적인 비극, 탁월한 작품’ 이라는 영예를 안겨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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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inversesquare.files.wordpress.com/2007/12/707px-othello_and_desdemona_by_alexandre-marie_colin.jpg?w=411&h=339>


 

2. Othello


  나는 개인적으로 인종차별, Racism에 관심이 많다. 대학에서 “영미문학특강” 이라는 수업을 들으며 이창래씨의 "Native Speaker" 를 접한 후 동양인 - 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서양으로 지칭할 때 우리가 동양이 되는 것 아닐까? 우리가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굴종적이지 않은가? - 이 서양에서 받는 대우나 그 환경적인 배경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팝음악을 좋아하여 영어가 그 쪽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도구의 일환임을 깨달은 성장기에도 계속 했던 생각이다. 영어를 통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좋았다. 폭이 넓었고 배울 점이 많았다. 다만 그러한 배움이 공고한 자신의 토양적 소속감이 없이는 ‘종속’ 을 향해 가고 사대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고등교육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던 점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이 작품은 비극이라기보다 치정극으로 다가와서 깊은 감명은 오지 않았다. 다만 흑인, 무어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이 매우 흥미로웠고, 그가 자신을 ‘자연스럽지 못한 것’ 으로 폄하하며 그의 사랑의 평탄하지 않음을 한탄할 때 나는 Shakespeare가 이러한 인종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비극의 서정성보다 피부색이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 더욱 흥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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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lehigh.edu/~spg4/lear1786.figure.jpg>


 

3. King Lear


  이 작품은 탁월하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인간은 유산, 이른바 불로소득을 물려받는 것에 대해서는 이리도 똑같은 행태를 보일까? 이 작품은 뉴스에서 접했던 한 사건을 연상시켰다. 부모가 자신들에 대한 봉양을 조건으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다. 자식은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기꺼이 그러겠노라 한다. 그러나 자식들은 돈을 손에 쥔 순간 서서히 변해간다. 결국 분노한 부모는 소송을 제기하여 재산을 돌려받기에 이른다. 이것이 혈연이라는 하늘이 내린 인연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애석하게도 리어왕에게는 좋은 변호사가 없었고, 그를 보호해줄 법체계가 없었다. 난 이점이 참 재미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를 지킬만한 법체계를 완성하고 켄트 백작 같이 충실하고 재치 있는 신하를 그를 변호할 대변자로 삼았다면? 리건이나 고네릴 같은 탐욕만 많고 자중지란에 빠질 정도로 모자른 자식들이 그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에 빠질 때는 말이다.

  여기서는 특히나 앞서의 햄릿과 같이 ‘악의가 없고 진실한 인간’ 의 억울하고 정말 뜻하지 않은 죽음이 있다. 코델리아는 좋은 인간성을 향한 운명의 태도에 대한 의심과 좌절을 유도할만한 인물이다. “저리도 생각이 있고 행동마저 올바르며,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자기를 내친 부모를 위해 목숨을 걸고 악인들에 대항하는 인물” 이 일개 병사의 손에 목이 졸려 죽어야하는가라는 의심 말이다. 부왕의 어리석음은 순수의 죽음을 이끈다. 어리석음이 비극이다. 현명하지 못한 위정자는 비극이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완전하지 못함이 비극을 이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작품에서 인간의 완전하지 못함을 사랑하는 깊은 통찰력의 문장을 많이 보여줬다. 정말 ‘무서우리만큼 속이 깊은 말쟁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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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jjuriaan.com/chasseriau_macbeth.jpg>


 

4. Macbeth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초반 도입부의 검은 안개가 낀 듯한 분위기도 좋고, 특히나 ‘흑마술’ 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중세의 암울함이 느껴지는 듯한 문장. 현재 많은 사람이 Fantasy 장르에 열광하고 있는데, Shakespeare는 참으로 이러한 판타지, 특히 음습하고 괴기해서 더욱 흥미가 가는 판타지의 세계마저 구축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과 깊은 내면의 갈등을 다룬 작품에 이 무슨 불경한 소리냐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본 작품의 절정은 Hecate가 등장하는 마녀의 의식이다. 알 수 없음, 두려울 정도로 기이함은 이 작품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그 무언가’ 로 만든다. 특히나 난 마녀들의 예언이 처음에 맥베스에게 ‘자신을 강하게 지켜줄 수호신, 확고한 언약’ 으로 다가선다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결국은 그러한 믿음들은 황당할 정도로 붕괴된다. 전략적으로 나뭇가지를 들고 이동하여 버냄 숲이 움직이는 듯 보이는 것도 언제나 흥미로웠고, 맥베스는 당연히 모든 남자는 여자로부터 태어나기에 자신을 파멸시키지 못할 것이라 굳게 믿지만 맥더프는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나온 남자였다. 그로서는 최후의 방어선,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선언의 순간이었다.

  운명은 마치 모래성을 쌓는 천진한 아이와 같다. 잘 쌓아놓은 모래성을 갑자기 확 변한 얼굴로 뭉개버리는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렵고 공포를 주는 아이. 아닌게 아니라 요즘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부쩍 아이들이 공포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운명은 그러한 어린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어찌 되었든 이 작품은 명분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희생양, Duncan 왕의 옹호자들이 승리한다. 연민은 가질 수 있지만 결국 탐욕으로 사람을 죽인 Macbeth의 죽음에서 정의는 돌아왔다. 사람들은 악인의 승리를 혐오한다. 그런데 또 한 번 의문을 던져본다. 과연 정의로운 자가 대접을 받고 있는 지금의 이 시대인가? 그렇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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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davidclaudon.com/Elizabethan/globe3.jpg>



5. 총론


  Shakespeare의 4대 비극은 확실히 재미있다. 그리고 깊은 공부를 할 계기를 준다. 4대 비극 속에서 가장 현명하고 사태를 직시하는 자들이 ‘광대’ 와 같은 상대적으로 천한 계층이다. 상류층, 귀족은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위선과 가식으로 자신을 꾸민다. 그것은 그들이 하고 있는 장신구만큼이나 헛되고 헛되다. Shakespeare는 참으로 기민하다. 그는 어용문학가이면서도 - 실제로 그의 비극은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 대중으로 하여금 ‘귀족’ 이라는 종자들이 하는 행태에서 통쾌한 비웃음을 끌어낼 수 있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크게 균형 있는 작가로서의 역량이 아닐까? 그렇기에 사람들은 ‘식민지 인도와도 교환이 불가한 문호’ 라는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칭호가 그럴 만도 하겠네라는 평가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밝히자면 그의 비극과 희극은 당대의 최고의 오락거리였다. 학문적인 시각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은 좋다. 그의 작품을 분석한 논문들에서 깊은 의미를 추출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당시 대중들이 그의 희비극을 즐겼던 방식 -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배우와 직접 소통하는, 그야말로 예술을 호흡하며 극한의 희열을 느꼈던 - 이 그를 어려워하지 않고 제대로 서로 간에 맨 얼굴로 대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생각해보라 이보다 더 흥미로운 심리 드라마, 치정극, 복수극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나 본질에서 멀어진 신격화는 본질을 흐린다. 이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생활양식을 신화화했던 점에 크게 분노했던 Roland Barthes 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아닐까? 일단 즐기고 그리고 성찰하면 된다. 물론 진지한 태도로 그의 문장 하나, 쉼표 하나를 샅샅이 훑는 것은 당연한 미덕일 것이다. 어느 영화 대사가 떠오른다.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 Shakespeare라는 ‘위대한 말쟁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강했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강한 문장가’ 이다. 너무 즐거웠음을 밝히며 이만 Shakespeare' s Four Major Tragedies 의 감상을 마감할까 한다.        



Mr. TExt  0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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